"선배들에게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있어요. 우리는 민중의 손으로 왕의 목을 자른 경험이 없어 이 모양이라는. 단순히 목을 자르는게 아닌, 그 후에 민중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대표자를 세우는 경험이 필요했지만, 우린 그건 못 했다는. 60년 4월 혁명 후에는 군인들이 왕좌를 차지해버렸고, 87년 6월 혁명 때는 유시민 장관 말마따나 목숨걸고 직선제 쟁취해 놨더니 사람들이 노태우를 찍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실패했는가? 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1894년 겨울에, 전투원만 2만이 넘는 동학군이 고갯마루 하나를 넘기 위해 진군을 해요. 동학군은 그 고갯마루 넘어 공주를 꼭 차지해야 했어요. 당시 공주는 전라, 경상, 강원, 경기로 길이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한성부로 진격하고, 그들의 기반이었던 전라, 경상으로부터 물자와 병력을 충원해 집결시키기에 공주가 최적의 장소였거든요. 
그때 고지에서 이들을 맞은 조일 연합병력은 후방 전투지원군까지 합쳐 고작 여단 병력. 조선관군은 우회하는 동학군을 유도해서 결국 동학군이 하나의 고갯마루를 향해 진격하게 만들어요. 그곳이 바로 너무 가파라서 소가 다니는 것을 금했다는 고개, 우금치예요. 
문제는 그곳에는 이미 적이 후방 포대와 기관총 진지를 구축해놓고 동학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동학군 지휘관들에게 전술이랄 게 아예 없었다는 것. 동학군은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진격을 합니다. 현대식 군사훈련도 못 받은 시민군이 부적 하나 품에 넣고 기관총에 전우가 쓰러지는 걸 보면서도 꾸역꾸역 고개를 올라요. 그렇게 고지 150여 미터 앞까지는 어떻게든 진격을 해냅니다. 우리가 K2 영점을 25m로 잡는 건 보통 250m 안에서 소총으로 교전한다는 의미지요? 마지막 동학 병사가 쓰러진 지점이 적 기관총 진지 150m 앞. 점령 불가능한 고지인 걸 알면서도 올려보낸 공격이 40회. 병력 2만 중 1만 7천 전사. 적은 70명 부상. 전 그때의 전봉준만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때 동학군들(aka농민)들이 뭐 대단한 군기가 확립이 돼 있어서 이탈하지 않고, 눈 앞에서 사람들이 쓸려 나가는 걸 보면서도 꾸역꾸역 고갯마루를 올랐을까요? 자유. 한 번 맛을 본 자유와 상식에 대한 갈망. 그때도 동학교도를 비웃고, 일본에 붙었다 청에 붙었다 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동학이 전라도에 집강소를 세워 자치를 하며 그 자유와 상식의 세상을 보았는데, 어떻게 다시 옛날 그 시궁창에 몸을 담고 살겠습니까? 그게 되나? 
2016년 우리도 똑같았잖아요? 전략? 전술? 그런 게 어딨었나요? 그냥 그 추운 겨울에 광장에 나와서 촛불 들고, 카메라 들고, 소리 지르고... 일베충, 넷우익, 뭐든 방구석에 앉아서 하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비아냥만 거리는 병신 새끼들의 조롱을 들으며,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는 선대의 피. 비유가 아닌 진짜 피를 발판 삼아 드디어 우금치 고개에 설 수 있었다는 거잖아요? 누구도 다치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문명이 있는 곳에서 꽃 피웠던 낭만주의는 아주 빠르게 시들어가고, 사람들은 낭만주의와 함께 지상에 꽃 피웠던 낭만이 꿈꿨던 이상과 다름에 너무도 빨리 실망하고,더러 그것을 비웃는데 누구보다 빠르게, 또 열심히인 인간들이 나타나기 마련 입니다. 루이 16세의 목을 뎅강 했다고 당장 시민들의 세상이 왔던가요? 그래도 험로를 걸어 결국 시민의 시대는 왔고, 왕족과 귀족의 시대는 저물어 갔지요. 
경복궁을 차지한 일본군과 썩은 조선의 탐관오리들이 보낸 관군. 그들이 세운 기관총 진지 뒤에 앉아 비웃는 거나 하는 인간들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두 눈을 뜨고 들판을 달리는 우리를 헤매는 쥐떼라 부르며 스스로 정원에 매인 개를 자처하는 비겁한 놈들. 
60년 4월, 69년, 80년 5월, 87년 6월, 08년 여름, 16년 겨울을 넘어 마침내 우금치 고갯마루에 올랐으니 언젠가, 그게 당장 내일은 아닐지라도 꼭 좋은 날이 올 겁니다" 

— ‘흙파먹어요’ 님 http://www.djuna.kr/xe/board/1355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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