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asked:
좋아하는 걸 일로 삼아도 될까요? 정확하게는, 좋아하는 걸로 일을 하면서도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요? 일로 선택하면 좋아하지 않게 될 것 같아요. 좋아하는 건 취미로만 두고 일은 별개로 해야 될지. 전공은 제가 좋아하는 걸 선택했고 이번에 졸업했어요. 그런데 전공대로라면 취업보다는 창업이 맞는 분야라 자신도 없고 막연하네요. 인생이 지루할 것 같기도 해요. 창업을 했을 때 몇십 년 후에도 내가 아주 어릴 때 선택한 걸 계속 하고 있다면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들고 젊으니 시간은 많다지만 고민이 되네요 그냥 적당히 취업하는 게 답일까요. ㅎ
flyasiana-deactivated20190903 answered:
제 모친은 학부에서 교육공학과 국문을 복수전공했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되었느냐면 아닙니다. 출판사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출판계에 있느냐면 아닙니다. 대학원에 갔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국문을 전공했느냐면 아닙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회복지사인가 하면 아닙니다. 사회복지사로 활동하다 다시 대학원에 갔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뭘 전공했느냐면 상담심리를 전공했습니다. 결국 뭐가 됐느냐면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이자 학회 1급 수퍼바이저가 됐습니다.
여기서는 잘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는 십대 때 카페와 로스터즈를 운영했습니다. 월 매출 2억 넘게 거두며 잘 나갔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최고의 바리스타나 원두왕 비룡이 되었느냐면 아닙니다. 군인이 됐더니 겸직과 수익활동이 금지랍니다. 사업을 넘기고 군에 정을 붙였습니다. 군사학을 전공했고 국가정보학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습니다. 그래서 송중기가 되어 송혜교와 행복하게 잘 살았느냐면 아닙니다. 2주짜리 작전에 투입되어 연락을 못 하는 사이에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해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잃을 것 없는 고독한 전사가 되었느냐면 아닙니다. 나라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재산을 기부하고 제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했느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기부도 영수증을 줍니다. 그래서 영수증 받고 제주에서 계획대로 생을 마감했느냐면 아닙니다. 반 년 동안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하고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섬사람이 되었느냐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됐을까요? 비서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쭉 비서일 것이냐면 아닙니다. 일 년쯤 뒤에는 제주로 이주해서 살아갈까 하거든요. 제가 볼 때 인생에는 개연이 없습니다. 예측 가능한 것 같으면 착각이에요. 맨날 지나는 도로 신호등도 언제 바뀌는지 여태 모르는데 무슨 개연이 있겠습니까? 살다 보니 인생에는 서사만 있습니다. 돌아보면 다 이야기가 되는데 바로보면 말이 안 돼요. 제 모친의 이야기나 저의 이야기에 더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뺀 것이 많아요. 부친의 이야기도 생략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유일하게 반전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부친의 인생에도 변수는 있었습니다. 반전 없는 삶에도 변수가 있다는 겁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연방수사국의 지원자는 5분의 1로 줄었고 국가정보원은 올 해 처음으로 인턴을 채용했습니다. 제일 안 그럴 것 같은 애들도 그래요. 어릴 적에 제 첫 여자친구가 비서학과에 다녔는데 김비서김비서 부르면서 놀리기나 했지 제가 김비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전공이 범죄인데 때려 치우고 임상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어요. 세상에, 저는 제가 임상을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임상심리는 수련이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레지던트하는 거예요. 대학병원들은 한 해에 몇 사람 뽑지도 않는 주제에 무급수련 시키는 곳이 반이고 최저시급도 안 주는 곳이 반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굶든지 하든지 둘 중에 하납니다. 수련 때려 치우고 만화가 된 분도 있어요. 적당히 취업하는 게 말처럼 적당히 될 것 같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배 자영업자로서 감히 말씀드리면 창업이 수십 년 동안 유지가 되려면 단조롭고 지루할 틈 같은 건 없습니다. 단조롭고 지루하면 내년이에요. 내년에 망해서 가게 뺍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단조롭고 지루하다면 굉장히 성공한 사업가가 된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단조롭고 지루하다면 수십 년 뒤에는 분명히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그게 좋으면 그냥 하세요. 망하면 돈은 잃겠지만 취향은 잃지 않습니다. 돈은 다시 벌면 되는데 좋아했던 건 미루고 나면 나중에 다시 돌아오지를 않아요. 저는 어릴 때 게임에 미쳐서 영혼을 팔았던 일을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습니다. 지금 다시 하면 진짜 재미 없거든요. 살다 보면 미쳐서 뭔갈 해본 기억이 없다는 게 불행이란 걸 알게 됩니다. 미치는 것도 타이밍이고 재미에도 때가 있습니다. 해보니까 재미 없네 싶으면 그때 때려 치우세요. 겨우 이걸 알기 위해 수천수억을 썼단 말인가 자괴감은 들겠지만 거지가 되면 어때요? 저는 비록 원두왕도 못 되고 송중기도 못 됐지만 분당 950타에 코드도 잘 짜고 포토샵도 잘하고 프리미어도 잘하고 다빈치 리졸브도 잘하고 라이노도 잘하고 키샷도 잘하고 샷도 잘 뽑고 라떼 아트도 잘하고 원두도 잘 볶고 사진도 잘 찍고 가사도 잘하고 민사도 잘하고 형사도 잘하고 혼자서도 잘 노는 군사학 수석의 거지가 됐습니다. 닌텐도 스위치에 아직 동물의 숲이 없다는 것만 빼면 돈 주고 살만 한 서사가 아닙니까?"
人生流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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